기록자: 정소류 감찰 대상: 홍려사 소경 여종선 사유: 정전에서 유임된 관원으로, 속내에 다른 뜻이 있는지 살펴볼 것. 이월 초나흘 오늘부터 여종선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대장은 그가 딴맘을 품고 …
기록자: 정소류
감찰 대상: 홍려사 소경 여종선
사유: 정전에서 유임된 관원으로, 속내에 다른 뜻이 있는지 살펴볼 것.
이월 초나흘
오늘부터 여종선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대장은 그가 딴맘을 품고 있을까 염려하시나,내가 보기엔 딴맘이 아니라 머리에 병이 있는 게 확실하다.
오늘 그는 추밀원의 왕 대인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왕 대인이 차가 너무 뜨겁다고 툭 한마디 던졌는데, 그는 꼬리에 불이 붙은 개마냥 달려들더니 자신의 소매를 펄럭여 찻잔에 부채질을 해대는 게 아닌가.
그러나 너무 의욕이 과했던 탓에 소매에 묻어 있던 먼지가 죄다 찻잔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왕 대인이 그 찻잔을 보더니 얼굴빛이 변했고, 홧김에 소매를 뿌리쳤다. 이때 여종선이 워낙 바짝 붙어 아양을 떨고 있었던 탓에, 그 손짓에 밀려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데도 그는 화를 내기는커녕 바닥을 한 바퀴 구르듯 기어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인께선 기력 또한 참으로 장사시옵니다! 방금 그 한 번의 손짓에 우리 대송의 위엄이 만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느꼈사옵니다!"
왕 대인은 그를 미친놈 보듯 슬쩍 훑어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이월 열나흘
아침에 보니 여종선이 집안 대대로 내려온 가보인 옥패를 전당포에 맡기고 웬 그림 한 점을 사서 한림 학사 이명원 댁으로 가져갔다.
그는 문 앞에서 두 시진이나 하염없이 기다렸는데, 콧물을 질질 흘릴 정도로 매서운 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이 대인이 그림을 한 번 보더니 '격이 떨어지고', '속되기 짝이 없다'며 잘라 말했다.
여종선은 멍하니 서서 어떻게든 명화라며 추켜세우고 싶으면서도, 감히 반박은 못 하고 우물쭈물 말만 흐릴 뿐이었다.
결국 이 대인이 눈에 거슬린다며 불호령을 내려 그를 내쫓았다.
지붕 위에 숨어 이 꼴을 지켜보던 나조차 기가 질려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삼월 초하루
오늘 일은 더 기가 막혔다.
여종선이 손양 주점에서 전전사의 교두를 만났는데, 그 교두가 술에 취해 자기 신발이 더러운데 닦아줄 시종 하나 없다며 사방에 허세를 부려 대고 있었다.
그러자 여종선은 군말 없이 쪼그려 앉더니 제 손으로 그 신발을 닦아주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거리 한복판에서 말이다. 내가 잠복 수행 중만 아니었어도 진작 뛰쳐나가 그자를 끌어냈을 것이다.
교두도 술이 반쯤 깨고 나서야 제 꼴이 우스운 걸 알았는지, 여종선을 발로 걷어차며 뼈대 없는 놈이 우리 대송의 체면을 깎는다고 욕설을 퍼부었다.
내가 봐도 지극히 맞는 말이었다.
삼월 보름
거의 두 달을 따라다녀 보니 대충 결론이 났다. 이 사람은 반역을 꾀할 배포도 없고, 그렇다고 벼슬할 재목도 아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오직 전조의 생존자로서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제 한 몸 살겠다고 비굴하게 매달릴 줄만 아는 인간이라, 누군가 거두어 줄 주인이 있어야만 비로소 안전하다고 믿는 등신에 불과하다.
지켜보는 내내 속이 뒤틀린다는 점만 빼면, 궐내에 딱히 큰 해가 될 위인은 아니다. 더는 지켜볼 가치가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