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문] 오늘은 일부러 단장까지 하고 거리에 나섰다가, 웬 점쟁이 하나와 마주쳤다. 입을 열자마자 내가 구류문 제자라느니, 몸에 허점이 여섯 군데는 된다느니, 쓰는 수법도 열 가지는 넘을 거라느니…
[고운문]
오늘은 일부러 단장까지 하고 거리에 나섰다가, 웬 점쟁이 하나와 마주쳤다. 입을 열자마자 내가 구류문 제자라느니, 몸에 허점이 여섯 군데는 된다느니, 쓰는 수법도 열 가지는 넘을 거라느니 줄줄이 떠벌리는 게 아닌가. 듣고 있자니 속이 슬슬 뒤집혔다. 누가 봐도 대놓고 내 밥줄을 건드리려는 수작이었다. 홧김에 승표를 뽑아 흠씬 혼내주고 말았다.
놈을 혼내준 뒤 곧장 돈주머니부터 뒤졌는데, 열어 보니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온갖 아는 체는 다하더니 어째 주머니는 이렇게 비었냐고 묻자, 얼굴을 붉히며 '지식인의 사정'이 어쩌고 저쩌고, 별 하나에 이름이 여덟 개나 된다느니 쓸데없는 소리만 늘어놓았다. 이게 다 무슨 소리람.
한바탕 실랑이를 벌이고 나니 더 붙들고 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지라 우선 그를 일으켜 세웠다. 투덜거리며 늘어놓는 신세 한탄을 듣다 보니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이정도의 말 재주라면 차라리 둘이 손잡고 점술 노점이나 차리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는 앞에서 그럴듯하게 떠들고, 나는 손님을 모으면 되지 않겠냐고, 수입은 반반으로 나누자고 했다.
그러자 도사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는, 관성술이란 게 천하의 명맥을 짚는 학문이지 점쟁이 같은 삼류 수법은 아니라며 버텼다. 그러니까... 정작 점은 못 치는 거냐고 묻자 "이 몸은 점을 못 치는 게 아니라, 안 치는 거다!" 하고 받아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이리 주머니가 비어있지... 쯧.
헤어질 때 보니 정말 땡전 한 푼 없을 듯해 보여, 안타까운 마음에 몇 닢 쥐여 주며 끼니나 해결하라고 했다.
하아, 젠장. 오늘은 또 왜 내가 남의 밥값까지 대주고 있는 거냐고!!
[청천문]
문 안에서는 다들 청천문이 재물신이라지만, 그렇다고 그들한테 대놓고 밥을 구걸하는 건 체면이 너무 상하는 일이라 차마 못 하겠더군. 나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지... 그런데 오늘 청천문을 따라다니다 보니, 이게 또 제법 그럴듯한 생각이 번뜩이는 게 아닌가!
놈들은 날마다 춘수각으로 몰려가 목욕을 즐기는데, 덩치도 큼직하고 몸도 성한 것이 제법 보기에 좋았다. 이걸 그냥 넘길 이유가 있나 싶어 창문 틈에 바짝 붙어 그림으로 그리면 한 장에 십 문쯤만 받아도 제법 쏠쏠하겠다 싶었다. 허나, 세상일이 언제 뜻대로 흘러가던가. 두 장을 채 그리기도 전에 바로 들켜 버리고 말았다.
그쪽 우두머리가 직접 나와 캐묻는데, 손아귀 힘이 어찌나 센지...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나와 버렸고, 그렇게 아는 대로 죄다 불어놓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 그런데 웬걸, 그 양반이 내 말을 듣더니 눈을 번뜩이며 이러는 게 아닌가.
"그림을 그린다고? 왜 진작 말하지 않은 거야? 내가 벗어 줄 테니 어디 제대로 한번 그려보게!"
아니, 이런 전개가 어디 있나 싶더군. 이래서들 청천문 제자들이 인심 하나는 넉넉하다고 하나 보다 싶었다. 그 형님은 자세까지 바꿔 가며 열심히였고, 나는 얼떨결에 붓을 놀려 한 번에 열 장이나 그려 냈다. 그걸 들고 거리로 나가니, 생각보다 반응이 엄청난 게 아닌가. 수중에 돈이 들어오고 나니, 아까 맞은 팔도 덜 아픈 것 같았고 말이다.
(다음 장)
오늘은 그 재물신이 또 날 찾더니, 이번엔 눈앞에 보이는 것만 그릴 수 있느냐고 묻더군. 직접 본 적은 없고, 남들한테서 들은 얘기만으로도 가능하겠느냐는 거였다. 된다 하자 말없이 돈주머니 하나를 툭 던져 주며 몇 사람을 그려 달라더라.
문제는 그 양반이 정작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한다는 점이었다. 입가에 점이 있었던 것 같다느니, 눈매가 어땠던 것 같다느니, 죄다 흐릿한 말뿐이었지. 그래도 돈을 이만큼이나 받았으니 어쩌겠나. 군말 삼키고 들은 대로 최대한 그려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수배용 초상화를 만드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완성된 그림을 들고는 뒷마당으로 가더니, 한 장씩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게 아닌가. 이렇게 큰돈을 들여 그린 걸 왜 태우나 싶었는데, 그 양반이 불길 앞에서 울고 있더군.
다 큰 사내가 그렇게 우는 건 처음 봤지. 괜히 가슴이 뭉클해져,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고 말이야. 어쩐지 묘한 하루였다.
[무심곡]
무심곡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았고, 설령 마주쳤다 해도 다가갈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약 한 첩으로 사람을 잡는다는 소문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말이다.
[구류문]
영심 사저가 내 일기를 보더니 한 마디 했다. 나처럼 양심 있는 사람은 속임수로 돈을 벌 수 없다면서 아예 포기하라는 게 아닌가. 대신 더 쓸 만한 방법이 있다며, 나중에 따로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듣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뭐, 나도 나름대로 생각은 해두었다. 정 안되면, 문진에 가서 그 책벌레들 대신 먹이나 갈아 주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지 않겠나? 강호가 이리 넓은데,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