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평생을 달려온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운명의 종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치 오래전 떠돌던 그 검은 상자처럼 고요했고 빛과 그림자는 어스름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난 삶이 처음부터 …
반평생을 달려온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운명의 종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마치 오래전 떠돌던 그 검은 상자처럼 고요했고 빛과 그림자는 어스름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난 삶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듯했다. 다시 어린 시절이었다. 스승은 그녀에게 정실에서 기를 운행하라 명했다. 눈은 감고 있었지만,
귀는 어느새 바깥으로 향해 있었다. 나무마다 매미 울음이 가득했고, 만사라 불리는 사형이 또 스승을 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여름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잔잔하게 들려왔다. 대체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얇은 책 한 권. 기껏해야 몇십 쪽밖에 되지 않을 텐데, 그는 천번 만번 돌이켜 읽는 것 같았다. 그 책 속에서 그토록 머물고 싶어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그녀는 몰래 기를 일으켜, 혼이 몸을 벗어나듯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책 속 글귀를 한 번만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마를 딱 하고 얻어맞았다. "기를 운행할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해야지."
이상하다. 스승은 어찌 그녀의 마음이 산만하다는 것을 알았을까?
이 한 방은 내밀었던 손을 거두게 했고, 흩어졌던 기운을 다시 현재로 돌려놓았다.
그래, 벌써 이렇게 오래 지났구나. 옛날의 설레던 마음은 이미 깊은 연못의 고요한 물이 되어버렸다. 이곳에는 더 이상 도의 다툼도 없고 기관의 톱니가 맞물리는 쟁쟁한 소리만 메아리쳤다.
이제 그녀는 충만한 기운으로 천연진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매미 소리 가득하던 그 여름 오후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천연진의 중추가 경맥과 연결되자, 뼈를 갉아먹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이 순간 그녀는 그 향기를 다시 떠올리고 싶었다.
그간 묵산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겨울밤이었다. 길을 가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또다시 귀가가 늦어져 결국 비를 맞아 온몸이 얼어붙은 채 밤늦게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집 문을 밀고 들어가니 꽃꿀 과자 같은 달콤한 향기가 풍겼다. 촛심에 무슨 향을 섞은 것인지, 그녀가 가장 좋아하던 냄새가 방 안 가득 번지고 있었다.
아궁이에는 죽이 끓고 있었고 만사 사형은 말없이 목연을 고치고 있었다. 스승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고, 그 사람은 그녀가 늘 앉던 자리 옆에 푹신한 방석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누구 하나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하고 달콤한 그 향기 속에서 그녀는 문득 무엇이 집인지 깨달았다.
그 온기 속에,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전란이 일어났고, 피난민들의 울음이 길마다 이어졌다.
전장 한복판에서 그녀는 본래라면 저녁 연기가 피어올랐어야 할 마을이 불길에 삼켜진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묵문이 추구하는 무릉도원이란 그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처럼 밥 짓는 연기를 바라볼 수 있고 돌아갈 집 하나를 가질 수 있게 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몸을 돌려 풍우를 향해 산 밖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천문과 진법을 연구하는 길에 몸을 던졌다. 언젠가는 천지의 온갖 이치를 통찰하여 세상이 오래도록 평안을 얻기를 바랐다.
그 뒤로 수많은 세월이 흘렀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수없이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그 따뜻한 촛불 향기를 맡을 기회도 다시는 없었다.
가끔 먼 길을 가다 산골 민가를 지나면, 창문 너머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곤 했다. 저 안에도 예전의 자신처럼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온 누군가가,따뜻한 온기에 조용히 안기고 있지는 않을까.
천하의 일이 끝나면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지.
심장의 고동은 점점 기관의 박자와 하나가 되어 갔다. 기다리던 그 향기는 이제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스승은 기를 운행할 때는 마음을 고요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제야 그 말을 깨달은 듯 했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사라진 그 순간, 새 한 마리의 울음소리만으로도 그녀는 다시 그 옛 기억과 그 따스한 향기를 떠올렸다.
어라... 그가 왜 여기 있지?
어쩌면 그녀는 끝내 믿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속 걸어가기만 하면, 앞으로, 더 높이. 언젠가는 하늘의 달에도 닿을 수 있으리라고.
그날이 오면 그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다가와 한눈에 그녀를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수없이 어긴 약속도, 수많은 목숨을 거둔 사람이라는 것도 모른 척한 채 그저 미소 지으며 말할 것이다.
"돌아왔구나."
꽃꿀 과자의 향기 속에서 그녀는 마침내 그가 그토록 반복해 읽던 그 한 페이지를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