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불빛이 꺼질 줄 모르던 봉룡서원에도, 칠흑같이 어두웠던 밤이 한 번 있었다. 그날은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처마 밑에 걸린 등롱은 하나둘 바람에 꺼져 갔고, 어느덧 초겨울이라 해는 일찍 저물…
늘 불빛이 꺼질 줄 모르던 봉룡서원에도, 칠흑같이 어두웠던 밤이 한 번 있었다.
그날은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처마 밑에 걸린 등롱은 하나둘 바람에 꺼져 갔고, 어느덧 초겨울이라 해는 일찍 저물었으며, 깊은 산속의 밤은 원래도 짙은 어둠에 잠기는 법이었다. 봉룡서원의 등불마저 모두 꺼진다면, 이 길을 지나는 사람은 필시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의논 끝에 제자들은 번갈아 등불 하나를 지키기로 했다. 며칠째 돌아오지 않는 선생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어딘가 이 길을 지나고 있을지 모를 나그네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누가 어느 순서로 지킬지는, 평소처럼 제비뽑기로 정했다. 늘 입씨름이 끊이지 않던 이들이었으니.
대나무 통이 흔들리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빗소리와 바람 소리 사이에서 묘하게도 맑은 가락처럼 울려 퍼졌다.
일경천. 유사농이 찾아왔다. 기름을 따르는 그의 손길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기름줄기는 곧게 등잔 심지로 흘러들었고, 이내 따스한 불빛 하나가 다시 피어났다. 그때는 빗줄기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 빗속을 바라보던 그는 품에서 작은 거친 천 보따리 하나를 꺼냈다. 늘 가슴 가까이에 품고 다니던 물건. 평소라면 좀처럼 남에게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내와 아이의 무덤에서 가져온 흙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만큼은 두 손으로 꼭 감싸 쥐고 있었다. 문득 묘와가 살아 있을 적, 비 오는 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만큼은 아직 함께 있는 셈 치자. 가족이 함께 빗소리를 듣는 것처럼.
이경천. 빗줄기는 조금 잦아들었다. 이번에는 나성무가 찾아왔다. 전 같았으면 이 시간에도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술잔을 주고받고, 풍악 소리에 취해 있었겠지. 밖의 벗들은 그를 잘 대해 주었고, 그가 듣고 싶은 말만 골라 해 주었다. 하지만 이 서원은 달랐다. 하나같이 성미가 보통이 아니었다. 특히 진원이라는 녀석은... 정말 말이 안 통했다. ...이상하네.
왜 하필 지금 그 녀석이 떠오르는 거지? 그는 기름을 채운 뒤 창가에 기대앉았다. 주룩주룩 이어지는 빗소리를 듣다 보니, 어느새 거문고 선율처럼 들려왔다. 돌이켜 보니, 봉룡서원에서 보낸 날들도 예전보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삼경천. 비바람이 가장 거셌다. 굵은 마디와 오래된 흉터가 남은 두 손이,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등잔을 단단히 붙잡았다. 유소매였다. 그녀는 자신의 두 손이 마음에 들었다. 마적이던 시절, 살아남기 위해 이 손으로 수많은 사람의 뺨을 후려쳤다. 물론 사람은 가려가며 때렸다. 악인에게는 사정없었지만, 선한 사람은 손만 들어 올리는 시늉으로 끝냈다. 봉룡서원에 들어온 뒤에는, 비석을 새기는 일도 한 번에 시원스럽게 해냈다. 삼경은 귀신들이 가장 활개 친다는 시각이라 한다. 하지만 유소매가 지키는 이곳에, 감히 어느 요괴가 발을 들이밀겠는가.
사경천. 비는 잦아들었지만, 스며드는 한기는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진원이 왔다. 얇은 이불을 둘러쓴 그는 기름을 아주 조심스럽게 따랐다. 한 방울이라도 더 쓰는 것이 죄인 양. 불꽃은 다시 환하게 살아났고, 노란 빛이 작은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제야 그는 품속에서 모서리가 닳아 해어진 책 한 권을 꺼내 등불 아래 조용히 펼쳤다. 춥다면 추운 대로 괜찮았다. 가문이 몰락한 뒤, 지금보다 더 궁색한 날도 수도 없이 견뎌 왔으니까. 봉룡서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평생의 행운이었다. 진원은 어깨를 한 번 움츠린 뒤, 등불 가까이 몸을 조금 더 기울였다.
오경천. 당문요가 찾아왔다. 가장 깊고, 가장 길고, 가장 지키기 어려운 시간이니, 당연히 자신이 맡아야 했다. 그래서 제비를 뽑을 때, 약간의 수작을 부렸다.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그는 대사형이었지만, 늘 자신이 너무 늦게 이곳에 왔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생각을 알아들은 듯, 밖의 빗소리가 어느새 부드럽게 잦아들었다. 마치 누군가 조용히 위로하듯. 늦지 않았다. 앞으로 살아갈 날은, 아직도 길다...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올 무렵, 비바람은 마침내 그쳤다.
누군가 하품을 하며 산길을 걸어 올라왔다. 손에 든 낚싯대에서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봉룡서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등불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주 작지만,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따스한 불빛이었다.
세상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문득 깨달았다. 평생 보아 온 수많은 일출과, 강호의 아름다운 풍경을 모두 합쳐도, 눈앞의 저 작은 등불 하나만큼 아름답지는 않았다는 것을.
참으로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