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잦아들고 잎이 진다. 돌연 숲속의 새들이 놀라 흩날린다. 나무 꼭대기에 꼿꼿이 선 그녀는 숲을 휘젓는 산적들을 굽어보았다. 검광이 번뜩이자, 적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갔다. 아…
바람이 잦아들고 잎이 진다. 돌연 숲속의 새들이 놀라 흩날린다.
나무 꼭대기에 꼿꼿이 선 그녀는 숲을 휘젓는 산적들을 굽어보았다. 검광이 번뜩이자, 적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쓰러져 갔다.
아녀자들이 화물 상자 틈에서 겁에 질린 채 기어 나왔다. 산적들과 다를 바 없는 검은 옷의 여인을 숨죽여 살피던 그들은, 그녀 몸에 밴 비릿한 피 냄새에 겁을 먹고는 말없이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서둘러 자리를 떴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무겁고도 느리게 이어졌다. 시신 뒤를 챙기려 몸을 굽힌 순간, 아이의 앳된 외침이 바람을 타고 그녀의 너울을 뚫고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대협!"
대협이라. 그녀는 검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듯, 그 두 글자를 자신에게서 매몰차게 털어버렸다.
세상이 이토록 썩어빠져서, 길을 가다 무심코 베어 넘긴 자가 도적이었고, 그 덕에 얼떨결에 두 사람을 구해 냈으니 곧장 '대협' 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이놈의 칭호는 잡초보다도 지독하게 번져 나가니, 푼돈보다도 가벼운 것이다.
적어도 누구나 굶주림 없이 살고, 아이들이 열 살까지는 무사히 자라나며, 산에는 짐승만이 남고 도적은 사라진 세상. 그때 가서야 누군가 그녀를 대협이라 부른다면, 비로소 그녀도 그 칭호를 짊어질 자격이 있으리라.
그런 세상을 일러 '태평'이라 부른다.
전에 누군가 그녀에게 그렇게 약속했었다. 그런 시대를 가져다주겠노라고. 하지만 지금, 그는 산야가 아닌 곳에 도사린 더 큰 도적이 되어 있었다.
산의 도적이라면 그녀는 베어 넘긴다. 산 밖의 도적이라도 마찬가지다.
숲의 새들이 다시 내려앉았다가 이내 날아올랐다.
그녀는 숲을 빠져나와, 다음 칼끝이 향할 곳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