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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 고향엔 이런 말이 있다. 씨가 마른 사람은 있어도, 씨가 마른 장사는 없다. 전쟁에서 졌다고 뭐가 달라지나. 부러진 검은 다시 녹이면 되고, 옥패는 전당포에 …

그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내 고향엔 이런 말이 있다. 씨가 마른 사람은 있어도, 씨가 마른 장사는 없다. 전쟁에서 졌다고 뭐가 달라지나. 부러진 검은 다시 녹이면 되고, 옥패는 전당포에 맡기면 되고, 갑옷은 피만 닦아내면 새것과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운 좋게 한두 명이라도 살려내면, 평생 은인으로 떠받들어진다. 이런 장사를 마다하는 건 바보뿐이다. 물론 나도 안다. 운 좋게 좋은 검 한두 자루 건지고, 목숨 붙여 돌아오면 그걸로 큰돈을 번 셈이다. 더 욕심내선 안 된다. 호타강 북쪽에 닿았을 무렵,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녹슨 쇳내와 흙 비린내가 뒤섞인 죽음의 냄새가 났다. 썩 유쾌한 냄새는 아니었다. 널린 시체들을 보자, 사람을 죽였던 과거가 떠올랐다. 오랑캐 한 명을, 그것도 장작 칼로 죽였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사람 목은 생각보다 질기고, 손은 생각보다 무르다... 됐다, 이 얘긴 그만하자. 허리를 숙여 뒤적이려고 할 때, 멀리 멀쩡히 서 있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진군 갑옷을 입고 빗속에 서 있었다. 위풍당당하긴 했지만, 너무 꼿꼿해서 오히려 기괴했다. 자세히 보기도 전에 강염이 왔다. 나는 황급히 몸을 낮췄다. 예전에 그가 한 번은 봐주었지만, 아직도 이런 밥벌이를 하는 걸 알면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는 빗속을 걸어왔다. 손에는 매화 보검을 쥐고 있었다. 난 그 검을 기억한다. 고급 철로 만든 멋진 검이다. 그 검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높은 사람들은 나보다 살길이 많지 않은가? 원망하려면 이 험한 세상을 원망해야지. 내겐 먹여 살릴 입이 둘이나 있다. 나는 그 검만 빤히 쳐다보며 기회를 기다렸다. 그가 가까워졌을 때, 그의 발걸음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저 멀리 선 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눈은 크게 뜨고 있었으나 동공은 이미 잿빛이었고, 얼굴은 푸르죽죽했다. 주변의 숨이 끊어진 사람들보다도 더 섬뜩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디서 본 얼굴 같았다. 곧 떠올랐다. 예전에 고향 거리에서 사람들이 영웅을 보겠다며 몰려나왔을 때, 나도 까치발을 들고 한 번 본 적 있었다. 왕청이었다! 의로운 대협이자, 백성들이 의지하던 장군이다... 왕청? 생각하고 있을 때, 검이 뽑혔다. 검은 이유 없이 뽑히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보검이 영웅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놀라 몸을 제대로 엎드리지 못할 뻔했다. 모두들 강염의 검이 빠르다고 한다. 한 사람 죽이는 데 열 걸음도 필요 없다고. 그런데 그는 검을 들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빗방울이 땅을 내리쳤다. 수없이 많은 소리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엔 결국 다섯 걸음만 남았다. 강염이 첫 걸음을 내디뎠다. 왕청 장군의 몸이 떨리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조금 사람 같은 기색이 돌아왔다. 두 번째 걸음, 어디선가 컥컥대는 소리를 들었다. 점점 다급해져 숨이 막히는 소리 같았다. 장군의 목 안쪽에서 푸르스름한 그림자 같은 것이 보였다. 세 번째 걸음, 장군의 갑옷이 갈라졌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더는 망설일 수 없다는 걸. 더 망설였다간 왕청 장군은 사라진다. 강염은, 바로 그것 때문에 온 것이다. 이 검이 떨어지면 장군은 구할 수 있지만, 강염은 어떻게 되는 걸까? 네 번째 걸음, 강염이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빗속인데도 그의 얼굴이 더 또렷이 보였다. 명성이 아무리 높은 협객이라도 결국은 소년이었다. 나 역시 사람을 죽이는 자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쾌감도 흉악함도 없이, 감출 수 없는 비통함만 가득했다. 검은 마음을 따라 움직인다. 그의 검은 흔들리고 있었다. 다섯 번째 걸음, 장군도 움직였다. 온 힘을 다해 한 걸음 내디뎠다. 강염의 검끝이 정확히 장군의 심장에 닿았다. 그리고 강염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들으려 했지만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검이 사람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를 조용히 맡기고 떠났다는 것을 느꼈다. 왕청 장군이 쓰러졌고, 비가 거세게 내렸다. 사람 죽이는 일에도 급이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어떤 사람은 속임수나, 비열한 수로 뒤에서 칼을 꽂아 사람을 죽인다. 죽이고 나면 자기 자신도 귀신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자신의 마음속에서 가장 깨끗한 부분마저 함께 잘라낸다. 죽이고 나면 영웅으로 남는다. 빗물이 얼굴을 강타한다. 짜고도 떫었다. 눈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염이 점점 멀어져 작은 점이 되어 가는 것만 보였다. 그가 이후 어디로 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나는 시체더미를 뒤지며 사는 이런 인간 말종인 내가, 어째서인지 한동안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날 비는 너무 무거웠다. 한참 뒤에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왕청 장군 곁을 지나며 다시 그 검을 보았다. 과연 아름다운 검이었다. 지금 당장 이 영웅검을 훔쳐 팔면 남은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를 숙여 팔을 뻗었다. 새로 주운 이 나무검은 손에 쥐면 한 치 남짓으로 짧고, 둥글고 무딘 검이었다. 손잡이에 매달린 평안 매듭도 피에 다시 붉게 물들어 있었다. 참 욕심도 많지. 전장에까지 이런 걸 품고 오다니.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것을 품속에 넣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고, 비는 아직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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