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에 항복하다니, 그건 개처럼 짖으며 무릎 꿇는 거나 마찬가지지. 나라면,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다면, 나는 고개도 못 들고 다녔을 걸. 어떤 개자식처럼은 안 살지. 석정은 멀리 서 있…
거란에 항복하다니, 그건 개처럼 짖으며 무릎 꿇는 거나 마찬가지지. 나라면, 아니 우리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다면, 나는 고개도 못 들고 다녔을 걸. 어떤 개자식처럼은 안 살지. 석정은 멀리 서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들은 그런 말을 지껄이며 다가와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떨어뜨렸다. '어이구, 하... 아니, 석정이구나.'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다시 폈다.
설령 지금 이 주먹이 그들에게 날아가 쓰러뜨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의 아버지 하휘가 싸움터에서 항복하며 무릎을 꿇었던 그 순간은, 결국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수년 동안 그를 짓눌러, 하정은 석정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고, 주먹으로는 사실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었다. 땅에 떨어진 약병은 이미 산산조각 났고, 상처는 다시 벌어져 피가 흘러나왔다.
아직 충분히 아프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늘 무예 대결이 잦았고, 상처도 많았다. 하지만 석정에게 가장 아픈 것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그 힘이었다.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 힘은, 그의 몸을 몇 치쯤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거란족에게 입은 상처만이 이 고통을 덮을 수 있고, 연운십육주의 땅만이 비틀거리는 몸을 다시 바로 세울 힘을 줄 것이다.
그런 날이 올 것이다.
그는 평생 두 번 일어서야 한다. 아버지의 무릎 꿇음을 대신해 한 번, 그리고 자신을 위해 또 한 번.
반드시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이름에 묻은 치욕은 씻을 수 있고, 의부도 그를 자랑스러워할 것이며, 마음속에 품은 그 사람도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올 것이다... 반드시 그런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