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도강' 계책이 막 끝났을 때, 봉여지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정악이 혹시 돌아서지 않을까? 그 생각이 언뜻 들으면 터무니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떠돌이 도적의 그 피비린내 나는 밤부터,…
'이대도강' 계책이 막 끝났을 때, 봉여지는 한 가지를 떠올렸다. 정악이 혹시 돌아서지 않을까?
그 생각이 언뜻 들으면 터무니없다는 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떠돌이 도적의 그 피비린내 나는 밤부터, 피고 지는 하루살이 꽃의 재앙과 홍수가 성을 덮친 일까지... 지난 12년 동안 그가 겪고 버텨 온 일이 너무 많았으니. 그래도 세상을 떠난 어머니 주우의 말로는, 정악은 결코 냉혹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로만 전해 들은 그 '아정'은 곧고 선했으며, 심의륜과도 의가 두터웠고, 승은촌 사람들을 비롯한 개봉의 백성들까지도 두 사람이 품던 이상 속에 들어 있었다.
일이 성과에 가까워질수록 그 걱정은 더 커졌다. 봉여지는 군량 운송을 핑계로 작은 배를 타고, 암시장을 거쳐 지하 암하를 건너 상평창 아래로 내려가 의형제의 속마음을 떠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마음을 잘 감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묻기도 전에 얼굴에 다 드러나 버렸다.
'나는 흔들리지 않겠다.' 정악이 단호하게 말했다. '악인을 모조리 소탕하지 않으면 착한 사람들은 살 수가 없어.'
'하지만... 언젠가 조송이 토지를 돌려주고, 승은촌 사람들도 차례로 뉘우친다면...'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다시 못을 박았다. '악인은 바뀌지 않는다. 늑대가 양가죽을 쓰고 양떼 속에 섞일 수는 있어도, 늑대는 결국 늑대다. 양을 잡아먹고 말 거야.'
'그래도...'
봉여지가 말을 잇자, 이번에는 정악이 곧장 끊어 버렸다.
'여지! 아완이 죽었어, 주우도 죽었어, 다들 죽었어... 컥, 컥.'
말을 맺자마자 그가 격하게 기침을 쏟아 냈다. 간신히 숨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마다 서늘한 기운이 배어 나왔다.
'내 곁엔 남은 친우가 얼마 없다. 그들은 살아야 해. 반드시 살아야 해. 그래서... 나는 흔들리지 않아.'
정악은 눈앞의 사람을 똑바로 응시했다. 봉여지는 예상 못 한 그 날 선 눈빛이 가슴에 콱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더는 말을 못 했다. 짧은 몇 마디 속에 밴 절망, 돌이킬 수 없는 슬픔, 물러설 데 없는 집착이 침묵 속에서 천천히 자라났다.
'다시는 오지 마라.' 정악이 짧게 대화를 끝냈다. '너까지 한독에 물들면... 스승 주우께 내가 뭐라 하겠느냐.'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굳은 사람처럼 뼈마디가 가볍게 삐걱거렸다. 그래도 미간 한 번 찌푸리지 않고, 묵직한 쇠문을 밀어 열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깊은 복도로 걸어 들어갔다. 흰 망토를 걸쳤건만, 그의 실루엣은 곧 거대하게 피고 지는 하루살이 꽃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삼켜졌다.
봉여지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어머니가 수없이 들려주던 그 소년이 다시 떠올랐다. '천하가 늘 평온하길' 바라던 뜻을 지키고, 뜻 맞는 벗들과 자신을 믿고 사랑해 주는 이들 곁에서, 마음속을 순정한 선의와 희망으로 채우던 소년.
봉여지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안타깝다... 그가 살아남았더라면 그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