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주, 내 아내여. 이 서신을 그대에게 쓰려고 한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소. 하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말하게 되면, 우리가 함께한 삶이 산산조각 날까 두려웠소. 하지만 그…
채주, 내 아내여. 이 서신을 그대에게 쓰려고 한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소. 하지만 도무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더군. 말하게 되면, 우리가 함께한 삶이 산산조각 날까 두려웠소.
하지만 그보다 내가 아무 말 하지 않고 죽으면 이 세상 누구 하나 내가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기억해 주지 않을까 두려웠소. 병은 점점 깊어지고 몸이 약해지니 두려움만 커지오. 그래서 그대에게 이 서신으로 모든 걸 알리기로 했소.
내가 그대를 속였소. 나는 연북맹의 병사가 아니라 거란족이오. 내 진짜 이름은 효라각이오. 그건 우리 거란의 어머니 강 이름이기도 하오.
십여 년 전, 나는 징집되어 전장으로 나갔고 효라각 강을 떠나 청하로 왔지. 청하에도 강이 있고 강가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소. 내 고향과 너무 닮은 모습에 그들에게 차마 칼을 겨눌 수 없어 도망쳤소.
청하의 지하 통로로 달아나던 중 연북맹의 병사를 만났소. 그 병사는 혼자였지만, 늑대 같은 눈빛이 너무나 무서웠소.
나는 그에게 애원했소. 내가 가진 모든 걸 보여주었고, 어머니가 축복을 빌며 건네주신 소뿔 목걸이도 내놓았소. 하지만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고, 나는 이제 죽겠구나 싶었소.
그런데 그자가 주저하더니 칼을 거두더군. 내 물건을 가져가지도 않고 목걸이도 돌려주며 보내주더구려.
지하 통로에서 빠져나온 후 나를 쫓던 우리 부족 병사들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걸 봤소. 거기에는 내 은인이 아직 그 안에 남아 있었소...
나는 겁쟁이였소... 차마 돌아가지 못하고 도망쳤소.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망쳤소. 그는 날 살려줬는데, 나는 되려 그를 돕지 않다니 참으로 비겁하지 않소?
그 후 칸은 철수했지만 나는 돌아갈 수 없었소. 탈영병은 돌아갈 자격이 없으니까.
나는 은인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서신 하나를 찾았소. 은인은 최소진이라는 사람이었소.
그리고 청하에 머물며 머리를 기르고 말을 배우며 중원 사람인 척 살다가 당신을 만났지. 그다음 일은 부인도 알 거요.
원래는 은인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풍화촌에 옛 병사들이 너무 많아서 나를 알아볼까 두려웠소. 보리가 익을 때까지만, 부인과 혼인할 때까지만, 아이가 조금 더 클 때까지만...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한 걸음도 떼지 못하였소. 하지만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더는 기다릴 수가 없소.
이제 은인을 고향으로 데려다줄 거요. 내가 돌아오면 이 서신을 그대에게 건네겠소.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다 받아들일 것이오.
하지만 당신에게 말하고 싶소. 나는 우리가 은월산 단풍나무 아래에서 만났던 날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소.